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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봉의 도시산책]잊혀진 최초의 신식무기 공장



삼청동길을 따라 삼청공원이 있는 북쪽으로 걷다 보면 이내 한국금융연수원에 닿는다. 그리고 정문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주변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한 벽돌 건물을 만날 수 있다. 구한말 무기 제조를 담당하던 관청인 기기국에 속해 있던 번사창이다. '번사'는 흙으로 만든 거푸집에 금속용액을 넣어 주물을 만들 때 이리저리 모래를 뒤치는 것을 뜻하는데, 번사창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대형 무기공장이자 최초의 신식무기 공장 가운데 하나다.

번사창 등이 들어선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강화도조약의 서막을 알린 운요호사건 때 일본의 근대적 군사력에 눌려 불평등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던 조선이 신식무기의 필요성에 눈을 뜬 것이다. 이에 조선 정부는 강화도조약 5년만인 1881년, 그나마 우군이었던 청나라에 서양식 총포와 탄약 등 신식무기 제조법을 배워오도록 영선사를 파견한다.

그런데 영선사 일행은 청나라에 1년도 채 머무르지 못했다. 일단 부족한 재정이 걸림돌이 되었고,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터지면서 급거 귀국길에 올라야만 했다. 근대적 과학기술과 신식무기 제조법을 마스터하기엔 턱 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으나 그래도 1883년 번사창을 비롯한 무기공장 착공에 들어가 이듬해 완공을 보았다.

조선이란 나라가 확실히 기울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이 대목이다. 어렵사리 공장을 돌리는 듯했지만 완공 10년 뒤인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과 뒤이어 청일전쟁까지 벌어지면서 일본이 조선 내의 모든 무기공장을 폐쇄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아예 문을 닫아걸게 했다. 자강을 위해 한 발 늦게나마 제도를 바꾸고 신식무기를 만들려는 시도도 했지만, 욱일승천하는 일본의 위세 앞에서 그 뜻은 힘 없이 접혀졌다.

그 뒤 일제강점기엔 세균실험실로 용도가 바뀌었고 해방 뒤에는 중앙방역연구소와 국립사회복지연수원 등으로 쓰이며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어버린 번사창…. 한국 최초의 근대적 공장, 그 중에서도 신식무기 공장일 뿐만 아니라 서울에 남아있는 유일한 조선시대 무기고이긴 하나 지금은 문화재 관련자 외에 일부러 찾는 이를 발견하기 힘들다.

/'다시, 서울을 걷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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